[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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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0.1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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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그 무렵 충숙왕은 밤마다 연회를 열고 술과 여자 속에서 살았으며. 기생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돈을 주는 바람에 국고가 탕진되고 말았다. 국고가 바닥났다는 보고를 받은 충숙왕은 내서사인 안균을 경상도에 파견하여 돈을 거두게 하여 향락생활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되자 대신들의 불만이 심화되었지만 왕은 불만 섞인 상소를 하는 신하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여 조정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충숙왕(忠肅王)의 이같은 행패는 왕고를 통하여 원나라 왕실에 보고되었고, 그러던중에 백응구 사건이 발생하여 1321년 3월 원나라의 입조 명령을 받아 충숙왕은 왕유에게 서무를 맡기고 연경으로 떠났다. 그리고 3년동안 원나라에 붙잡혀 있으면서 왕위를 노리던 왕고의 협박을 받으며 지냈다.

이 무렵 충선왕(忠宣王)은 고려로 돌아가라는 원나라 영종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유배된 상태였고, 충숙왕은 거의 폐위된 상황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1322년에 경사만 등의 대신들이 충숙왕을 복위시켜 고려로 돌려보내줄 것을 원나라 왕실에 요구했지만 왕고 세력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에 진찬성사 권한공(權漢功)은 심양왕 왕고를 고려 국왕으로 세울 것을 원나라에 요청하기 위해 자운사에 백관들을 모아 놓고 원나라에 보낼 문서에 서명을 강요했다. 하지만 운선좌 등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자 왕고파인 유청신, 오잠 등은 원나라 조정에 서면을 보내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고려를 원나라에 편입시켜 성(省)을 설치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원나라 왕실은 이같은 터무니없는 요청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처럼 국권이 완전히 상실된 가운데 제주 만호 임숙의 학정에 반발하여 제주 백성 1천여 명으로부터 임숙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올라왔고, 전라도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임숙을 파면하고 박순인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는 한편 송기를 파견하여 왜구를 격퇴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진정시켰다.

고려 사회와 충숙왕에게 이러한 난관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원나라의 영종이 죽고 태정제(진종)가 왕위에 오르게 되어 상황은 급변하였다, 태정제는 유배중이던 충선왕을 다시 연경으로 불러들이고 충숙왕을 풀어주었다. 그래서 3년간 왕위를 상실한 채 연경에 머물러 있던 충숙왕은 1324년 2월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충숙왕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귀국하던 그해 2월에 왕고의 동생 연덕대군 왕훈이 위사 김영장의 처를 간음한 죄로 순군에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충숙왕과 심양왕 왕고의 세력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왕고의 힘에 밀린 충숙왕은 결국 왕훈을 풀어주고 그를 원나라로 보냈다.

그 후에도 왕고의 왕위찬탈 위협이 계속되자 충숙왕은 원나라의 지원을 받기 위해 다시 원나라에 위왕 아목가의 딸 금동공주(조국장공주)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충선왕도 충숙왕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태정제에게 충숙왕의 무고함을 간언하였다.

이렇게 하여 충숙왕은 가까스로 왕권 회복의 기틀을 마련하는 듯했지만 이듬해 10월 조국장공주가 용산원자를 낳고 산고(産苦)로 18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 때문에 충숙왕은 다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충숙왕의 입지가 약해진 틈을 타 왕고의 왕위찬탈 음모가 다시 진행되었다. 왕고는 태정제의 신임을 얻은 후 평장정사 매려와 사인 역특미실불화를 고려에 보내게 하고 박중인, 조유, 조운경, 고자영 등의 측근들을 딸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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