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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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0.2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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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덕녕공주는 그해(1344) 윤2월에 정승 채하중, 사공 강호례, 정당문학 정을보, 동지밀직사사 김상기와 설현고, 밀직제학 장항 등에게 국정을 참의할 것을 명령하고 함양군 박충좌, 양천군 허백을 판전민도감사에 임명하였다.

또한 한범, 장송, 심노계, 전두걸불화, 정천기, 소경부, 조성주 등 충혜왕이 편애하던 인사들을 대부분 귀양보내거나 낙향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충혜왕 때 내린 직첩들을 모두 회수하고 기강을 바로 잡았다.

이때 충목왕은 서연에서 우정승 채하중을 비롯한 수십 명의 신하들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정치와 예의를 익혔다.

한편 덕녕공주는 충혜왕이 신축한 궁궐을 헐고 그 자리에 학문을 승문관을 세웠다. 학문을 진작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1345년에는 충선왕 때 제작된 민지의 <편년강목>을 보충하여 편찬하게 하고, 부원군 이제현, 찬성사 안축, 한산군 이곡 등에게 명하여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등 3대 실록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1347년에 1월에는 밀직사사 전윤장을 교주도 도순문사로 임명하여 쌍성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의 숫자를 파악하게 하고, 김민술을 양광도로, 이원구와 김영리를 전라도로, 남궁민과 이배중을 경상도로, 박광후와 최원우를 서해도로, 정인을 평양으로, 김구발을 강릉도로, 곽연을 교주도로 각각 파견하여 토지를 측량하게 하였다.

덕녕공주가 이처럼 국가기강을 바로 잡으며 경제 살리기에 노력하고 있는 동안 충목왕은 급속도로 병약해지더니 1348년 8월에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덕녕공주는 충목왕(忠穆王)의 거처를 건성사로 옮겨 요양토록 하고, 자신은 밀직부사 안목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여 그곳에서 국정을 보살폈다.

그후부터 덕녕공주는 왕의 쾌차를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기도장을 차렸지만 왕의 병은 더욱 악화되어 거처를 다시 김영돈의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해 12월 충목왕(忠穆王)은 모후 덕녕공주의 지극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12세의 어린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앓고 왕위에 오른 것이 화근이었다.

능은 명릉으로 개경 송악산에 마련되었으며, 결혼 전에 죽었기 때문에 가족은 없었다.

충목왕(忠穆王)의 뒤를 이어 고려 제30대 왕으로 등극한 충정왕(忠定王)은 충혜왕의 둘째 아들이자 희비 윤씨 소생으로 1388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저(㫝)이고, 몽고식 이름은 미사감타아지다.

1348년 4월에 경창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2월에 충목왕이 죽자 덕녕공주가 덕성부원군 기철과 정승왕후에게 서무(庶務)를 대행시키고 충목왕의 죽음을 원나라에 알렸다. 부고(訃告)를 받은 원나라의 순제는 이듬해 2월에 왕자 저(呧)를 입조시켰다.

하지만 고려 조정에서는 왕자 저(呧)를 왕으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신하들이 많았다. 그래서 노정, 손수관, 이균해, 민평, 최유, 윤시우 등이 그를 데리고 원나라 연경(燕京)으로 떠나려 하자 전법관들이 회의를 소집하여 그들을 저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원나라 사신의 힘에 밀려 전법관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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