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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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0.24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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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충목왕(忠穆王), 충정왕(忠定王)은 모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고려의 정치는 간신(奸臣)들의 손에 농락되어 매우 어지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충숙왕의 왕비 덕비 소생인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공민왕은 어려서부터 원(元)나라에 들어가 자랐기 때문에, 몽고의 풍속은 물론 그들의 내부적인 사정도 잘 알고 있었다. 공민왕은 원나라 황실의 근친인 위왕(魏王)의 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아내로 맞이하여, 이 인연으로 원나라 황실과 가까워져 고려의 왕으로 들어 오게 되었다.

노국공주는 공민왕과 같이 들어와 왕의 정치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초기에 그렇게 강성했던 원나라의 세력이 점점 약화되어, 중원대륙 여러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1351년 12월 고려로 귀국한 공민왕은 첫째의 개혁정책으로 몽고식 변발을 없애고 지난날의 고려식으로 머리를 위로 올리도록 했다.

또한 고려의 조정안에 원나라의 권신이 많음을 마땅치 않게 각하여, 먼저 기황후(奇皇后)의 친척과 그 일당을 없애고, 나아가 쌍성총관부를 고려의 영토로 만드는 등, 대원정책(代元政策)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배원정책(排元政策)을 골격으로 하는 일련의 개혁정책을 통해 국권을 되찾고 잃었던 북방의 영토를 회복함으로써 원나라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체제 구축을 위해 매진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공민왕은 왕위에 오른지 8년이 되도록 노국공주의 사이에 소생이 없자, 고려의 양가집 규수 이제현의 딸을 취하여 혜비(惠妃)로 맞아 들였다. 왕자를 보자는 조정 대신들의 간곡한 뜻인지라, 노국공주의 승인을 맡고서야 혜비(惠妃)를 입궁시킨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동의를 했다 하나 씨앗을 본 노국공주의 마음이 편안할 리는 없었다.

공민왕 10년에는 원나라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홍건적(紅巾賊)이 개경(開京)으로 쳐들어 왔다. 왕은 이 난을 피하여 노국공주와 함께 남쪽으로 몽진(蒙塵)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충렬왕 이후 세워 놓은 개경(開京)의 건물과 모든 시설들은 모두 파괴되어 폐허로 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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