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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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1.04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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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그러자 조일신은 막무가내로 장승량 등 자신과 함께 거사에 가담했던 사람들에게 역모염의를 뒤집어씌워 죽여버렸다. 자신이 역적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하여 미리 선수(先手)를 친 것이다. 그후 조일신은 다시 좌정승으로 승진하고 찬화안사공신에 책록되었다.

하지만 조일신의 이 같은 행동은 스스로 죽음을 자청한 격이 되었다. 자기 손으로 자신의 도당을 죽임으로써 급속도로 힘이 약해졌던 것이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공민왕은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당시 단양대군 왕유의 집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은 급히 이인복을 불러 불러들였다. 이인복은 용기 있고 강직한 성격이라 공민왕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인복을 보자 공민왕은 근심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이제 더 이상 조일신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 말에 이인복은 공민왕의 의중을 파악하고 직언을 하였다.

“어물어물 하다가는 전하께 불리하게 되옵니다. 때가 온 듯 하오니 칼을 뽑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시옵소서”

공민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은밀히 백관을 모아 조일신을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김첨수에게

"곧바로 조일신을 체포해 오도록 하시오”

하고 명령했다.

김첨수는 군사들을 데리고 가서 조일신을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곧 바로 사형되었으며, 그의 도당 나영걸, 을보, 이권, 고충걸, 이종 등이 25명도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이로써 조일신이 주도한 임진정변(壬辰政變)은 종결되었다.

조일신을 제거한 공민왕은 그의 도당 정을보, 이권, 나영걸, 고충절, 이군상 등 30여 명을 하옥하여 왕권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이제현을 우정승.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임명하여 명실공히 개혁정권을 수립하였다.

조일신의 반란이 종결된 이후 공민왕의 개혁정책과 배원정책(背元政策)이 더욱 가속화되자 친원(親元) 세력인 기철 일파는 불안을 느껴 공민왕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기철은 행주 사람으로 몽고식 이름은 백안불화이며, 기자오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기자오는 음관으로 산원 벼슬을 얻은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총부산랑이 되었다가 선주 수령이 된바 있다.

기자오는 전서 이행점의 딸과 결혼하여 기식, 기철, 기원, 기주, 기륜 등의 아들과 기화, 기명, 기연 등 세 딸을 얻었고 그 중 장남 기식은 어린나이에 죽었다.

그런데 그의 막내 딸 기연이 원나라에 공녀(貢女)로 바쳐져 궁녀로 입궁하였는데 왕(순제)의 눈에 들어 제2왕후의 자리에 올라 태자 애유식리달랍을 낳았다. 기씨 형제들은 그녀의 힘을 의지하여 고려 조정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기철이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여동생(기연)이 원나라의 왕후로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 조정은 기씨 형제들에게 각별한 대접을 하였다. 충혜왕 때 기철은 정동행성 참지정사로 임명되어 고려 조정에 파견되었으며, 기원은 한림학사에 재직하였다. 이에 그려 조정은 기철을 정승으로 임명하여 덕성부원군에 봉하고, 기원은 덕양군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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