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상태바
[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1.06 1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28.

왕의 명령을 받은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은 원나라 복속 이후 1백 년간이나 존속해온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 및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서북면 병마사인 평리 인당과 밀직사사 장중경과 함께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 등 세 곳의 원(元)나라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고려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자 원나라 수비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크게 패하였고, 그동안 원나라가 강제로 점령하고 있던 서북면과 동북면 일대의 고려 영토를 다시 찾았다. 그리고 원나라의 반격에 대비하여 서북면 일대의 국경 수비를 강화하였다.

이처럼 서북면 일대의 국경에서 원나라와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던 어느날, 공민왕은 승려인 보우를 내전으로 불렀다. 왕 앞에 엎드린 보우는 입을 얼었다.

“폐하! 소승을 어찌 불렀사옵니까?”

“우리 고려는 그동안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 오너라 역대의 어느 왕도 불교에 관심을 갖지 못했소. 그래서 짐은 불교의 중흥을 위해 그대를 왕사로 임명하여 불교 중흥을 도모하고자 하오. 그리고 승직에 관한 모든 권한을 그대에게 대행토록 할 것이오”

“성은이 망극하오이다. 소승을 이토록 배려해 주시니 불교중흥을 위해 성심을 다할 것이옵니다”

“그렇게 해 주시오”

공민왕의 불교중흥 정책은 태조의 유지를 받들고, 문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재현하기 위한 시도인 동시에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던 유학자 출신 관료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공민왕이 불교 중흥을 통해 민족성 회복운동과 배원정책(背元政策)을 동시에 실시하자 원나라는 고려의 절일사 김구년을 요양성에 가두고 80만 군사를 동원하여 고려를 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공민왕은 이자춘에게 서북면 일대의 수비를 강화하도록 명령하고, 병력을 증가하여 원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이 무렵 원나라는 고려와 전면적으로 전쟁을 치룰 입장이 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원나라의 국력이 쇠퇴의 길로 치닫고 있었으며 반란의 조짐이 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나라는 서북면 일대의 영토를 돌려주지 않으면 고려를 치겠다는 입장을 계속 주장하자 조정의 대신들은 개경의 지형이 원나라 군사에게 노출된 점을 감안하여 도성에 외성을 세우는 한편 남경(한성)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자 공민왕도 조정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제현으로 하여금 천도작업에 주관토록 하는 등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그런 의지와는 달리 고려(高麗)는 원(元)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할 실질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공민왕은 원나라의 80만 대군을 피하기 위해 서북면 병마사인 인당을 희생시킬려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을 쓰는 등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지만 1356년 7월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가 쌍성을 함락시키고 고종 말년에 원나라에 빼앗겼던 함주 이북의 땅을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