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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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1.12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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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이외에도 김용은 살인사건에도 가담했다. 오래 전부터 자신과 공민왕의 총애를 다투던 정세운이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과 함께 흥건적과 싸워 큰 공을 세우자 이를 시기한 김용(金庸)은 왕의 서신을 위조해서 안우, 김득배, 이방실에게 살인죄를 뒤집어씌워 안우는 수하를 시켜 망치로 때려 죽였으며, 김득배, 이방실, 박지억도 살인죄로 붙잡혀 죽었다.

이처럼 김용(金庸)은 권력을 위해서는 살인도 서슴지 않는 인물이었으며 급기야 왕권을 탈취하기 위해 공민왕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1363년 윤 3월 초하룻날 밤 김용은 공민왕의 처소를 급습했다. 이 때 왕의 호위 인원들은 모두 달아나고 첨의평리 왕자문, 판전교사 김한룡을 비롯한 10여 명이 죽음을 당하였다. 하지만 공민왕은 내시(內侍) 이강달이 공민왕을 급히 태후의 밀실로 숨기는 바람에 공민왕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공민왕 침소에는 환자 안도적이 대신 누워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김용은 공민왕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도당들을 궁중의 모든 일을 관장토록 하고 주방에 명령하여 왕의 밥상을 차리라고 하였다. 공민왕을 안심시켜 스스로 나오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경에 머물고 있던 재상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재상들이 묘련사에 모여 왕의 복을 기도하는 행사에 갔다가 왕의 사변(事變) 소식을 듣고 순군들을 소집하여 반란 세력을 토벌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김용은 그곳에 능청을 떨며 나타나 유탁에게 반란 소식을 전하고 최영, 오인택 등과 함께 순군들을 거느리고 가서 자신의 수하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유탁은 역모사건이 김용(金庸)의 소행인지 알고 있으면서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김용의 행동을 방관하고 있었다.

김용이 조정에서 사라진 후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여론이 높이지자 공민왕은 대호군 임견미와 호군 김두를 보내 김용을 경주로 이배시켜 안렴사 이보림에게 김용을 국문 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 김용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였다.

“내가 8년 동안이나 재상으로 있으면서 하고 싶은 일은 못해 본 것이 없는데 왜 상감을 헤치겠는가? 나는 단지 시중 홍언박을 제거하려고 했을 따름이다”

김용(金庸)의 이 말에 임견미는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전하의 침소에 누워있는 안도적을 죽였는가? 분명히 전하를 죽이기 위해 전하의 침소에 들어 왔으니 전하를 대신하여 안도적이가 죽은 것이다.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을 더 이상 변명을 하지 말라”

김용은 이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임견미는 형리들에게 명령했다.

“죄인을 형틀에 올려 놓고 사지가 찢겨지도록 쳐 죽여라! 그리고 죽은 후에는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내어 저자에 내걸도록 하라!”

인겸미의 말처럼 김용(金庸)은 사지가 찢겨져 전국에 흩어지고 머리는 개경으로 보내져 저자에 효수되었다. 이로써 김용의 반란사건은 종결되었다.

최영과 오인택이 김용의 반란을 제압하면서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공민왕이 채 숨도 돌리기 전에 원나라의 왕후 기씨의 사주(使嗾)를 받은 최유가 덕흥군 왕혜를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였다.

최유는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의주를 함락하고 다시 선주에 진영을 설치하였지만 고려 장군 최영과 이성계의 활약으로 보름 만에 압록강을 넘어 퇴각하였다.

그러나 최유는 원나라 군사에 의해 체포되어 고려로 압송되어 참형되었다. 고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밀직부사 김유를 원나라에 보내 덕흥군을 고려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이 때가 1365년 1월이었다. 하지만 원나라측은 덕흥군을 병을 핑계삼아 고려의 요구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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