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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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2.1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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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영비 최씨는 최영의 첩실의 딸로 1388년 3월에 왕비에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첩실의 딸이라 최영은 우왕에게 시집보내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우왕은 간곡하게 영비를 원했고, 이에 최영은 삭발을 하고 절로 들어가겠다는 표현을 하면서까지 우왕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우왕은 필사적이었다.

결국 우왕(禑王)은 자신의 뜻대로 영비 최씨를 왕비로 맞아 들였다.

이성계와 조민수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의 세력이 축출되고 우왕(禑王)이 폐위되자 조정은 회군(回軍) 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조민수 세력과 이성계 세력으로 갈라져 권력다툼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들 양 세력의 대립은 차기 왕을 세우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이성계 일파는 종친들 중에 한 사람을 택하여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는데 반해 조민수 일파는 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정 내 세력이 크지 않았던 조민수는 당시 명망이 높던 이색(李穡)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다. 조민수의 도움 요청을 받은 이색(李穡)은 공민왕의 제3비 익비 한씨로 하여금 창왕(昌王)을 왕으로 세울 것을 명령하는 교지(敎旨)를 내리도록 하였다.

이로써 우왕(禑王)의 맏아들이자 근비 이씨 소생인 왕자 창(昌)이 고려 제33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는 불과 9살이었다.

어린 창왕(昌王)이 등극함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 이색(牧隱 李穡)과 조민수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이 때문에 이성계는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원하였으나 받아 들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색(李穡)과 조민수가 정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이성계는 정도전(鄭道傳), 조준 등과 협의하여 개혁을 단행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는데 많은 신진관료들이 이에 찬성하고 있었다.

이성계파의 개력을 주도하고 있던 사람은 조준이었다. 조준은 관제, 신분, 국방 등 국정 전반에 대한 혁신을 주장하고 그 내용들을 이성계, 정도전 등과 협의하여 1388년 7월에 토지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전제개혁소(田制改革訴)를 올렸다.

이 때 조민수는 이들의 개혁안에 대해 지나친 거부 반응을 보이다가 이인임과 친척 관계로 한때 부정한 짓을 하였다는 조준의 탄핵을 받아 그해 8월에 창녕으로 유배되었다.

조민수의 유배는 이색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하지만 문하시중으로 있던 이색은 이림, 우현보, 변안열,, 권근 등과 함께 이성계파의 전제개혁에 대한 주장을 억제하며 가까스로 정권을 유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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