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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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2.1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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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그리고 이성계는 김저를 국문한 결과 변안열, 이림, 우현보, 왕안덕, 우홍수 등이 공모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그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처형된 이들은 모두 다 이성계를 반대하는 무리들이고 이들의 우왕 복위사건은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으로 창왕(昌王)을 폐위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 이 때가 1389년 11월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성계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대거 숙청되자, 창왕(昌王)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달인 12월 신종의 7세 손인 공양왕이 즉위하자 왕명을 받은 대제학 유구에 의해 창왕(昌王)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했다. 이 때 창왕의 나이 불과 10살이었다.

고려 제34대 왕으로 등극한 공양왕(恭讓王)은 제20대 왕 신종의 6세 손인 정원부원군 왕균과 그의 정실 부인 왕씨 사이에서 1345년 2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요(瑤)다.

처음에 정창부원군으로 봉해졌다가 다시 정찬군으로 개봉되었으며, 1389년 11월 이성계, 정몽주, 조준,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제 34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는 이미 불흑을 넘긴 45세였다.

그를 왕으로 세우기 앞서 이성계, 신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등은 흥국사에 모여 창왕을 폐위하고 종실에서 적당한 사람을 선택하여 새로운 왕으로 세울 것을 결의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정창군 왕요를 차기 왕으로 지목하고 있었으나 이성계의 정치참모 역할을 하고 있던 조준은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조준은

“왕요가 부귀한 환경에서 자라 가산을 다스릴 수 있을지 몰라도 나라를 다스일 인물은 못된다고 판단됩니다. 제가 반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성석린이 말했다.

“왕을 세우는 데는 인물됨됨이 중요하지 촌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왕요를 추대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참석자들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성석린의 주장대로 욍요(王瑤)를 포함한 종실 인물 중에서 몇 명을 놓고 표(票) 대결을 벌인 결과 정창군 왕요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아 차기 왕으로 결정되었다.

다음 날 이성계를 비롯한 아홉 명은 공민왕의 제3비 익비 한씨를 찾아가 창왕을 폐위하고 정창군을 차기 국왕으로 옹위한다는 교지를 내려 줄 것을 요청했다. 익비가 별다른 저항 없이 창왕을 폐하고 정창군을 차기 국왕으로 결정한다는 교지를 내리자 왕요(王瑤]는 국왕에 올랐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그를 옹립한 이성계(李成桂) 등 아홉 명의 대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때 일시적으로 이색(李穡)이 판문하부사에 임명되어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대간에서 창왕의 즉위를 도운 일을 탄핵하는 바람에 정계 복귀 한 달만에 파직당하고 아들 이종학과 함께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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