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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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2.2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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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게다가 당시 원(元)나라 쌍성지역에 있는 백성들에게 호구(戶口) 조사를 실시하여 그 곳에 있던 고려인들을 몹시 불안하게 했다.

이런 일들은 쌍성의 고려인들을 이끌고 있던 이자춘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일이었다. 이 때문에 이자춘(李子春)은 원(元)나라에서 등을 돌려 고려(高麗)를 돕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원(元)나라의 힘이 약화되자 공민왕은 반원정책(反元政策)을 실시하여 동북면의 쌍성총관부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기씨(奇氏) 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이를 위해서는 동북면 유민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자춘(李子春)은 공민왕의 이러한 의도를 간파하고 1355년 공민왕을 만나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치면 치면하면 자신이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 이듬해에 이자춘은 아들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고려가 실로 99년만에 옛땅을 회복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면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다. 이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이성계는 고려 조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성계는 원나라에 빠앗겼던 쌍성총관부를 재탈환 하기 위해 침입한 나하추 부대를 격퇴시키면서 장수로서의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쌍성총관부를 빼앗긴 원나라는 여진족 장수 나하추로 하여금 고려를 칠 것을 요청했고, 나하추는 3만의 순사를 이끌고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인 삼살(북청)과 흘면(흥원) 일대를 공격했다. 그러자 고려는 동북면도휘사 정휘를 내세워 나하추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를 거듭했다.

그러자 고려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여 나하추 군대와 대적케 했다.

2월에 남침을 감행한 나하추 부대가 고려 땅을 공격한 지 이미 5개월이 지나 때는 여름의 막바지를 향해 치달리던 7월이었다.

나하추의 주력 부대는 흥원 달단동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승전을 거듭한 결과로 군사의 수가 두 배로 불어났고, 사기도 한층 고조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하추는 계속되는 승전에 도취되어 이성계 부대를 얕보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나하추 부대의 대패였다. 나하추의 선봉 부대는 이성계 부대에 쫓기다가 거의 전멸되다시피했고, 이에 격분한 나하추는 진영(陣營)을 덕산동으로 전진 배치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먼저 야음을 나하추의 주력 부대를 기습했다 이 기습으로 나하추는 다시 달단동으로 후퇴했지만 이성계는 공격을 늦추지 않고 맹공을 가해 잔병들을 거의 섬멸해버렸다.

이 전투에서 나하추는 대패하여 수하 몇 명과 함깨 겨우 목숨만을 건져 심양으로 되돌아갔으며, 그 후 세력이 약회되어 명나라의 주원장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성계의 활약은 비단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성계는 나하추를 격퇴시킨 후에도 약 30년간 전장을 누볐으며, 그때마다 승리를 거둬 고려 최고의 장수로 맹위를 떨쳤다.

이성계는 승전할 때마다 지위가 올라갔다. 1362년 동북면병마사가 된 이후 같은 해에 밀직부사에 제수되고, 1382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1384년에는 동북면 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었으며, 1388년에는 수상격인 문하시중(門下侍中) 바로 아래인 수(守)문하시중이 되었다.

이성계에게는 이복형이 있었는데, 이름은 이원계였다. 이원계(李元桂)는 환조 이자춘이 자신의 노비였던 내은장을 취해 낳은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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