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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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2.3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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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이원계는 적자(嫡子)인 이성계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성계는 이원계가 서출임에도 불구하고 형으로 깍듯이 대접했다.

이원계는 공민왕 때에 이성계 휘하에 있으면서 홍건적을 격퇴한 공로로 2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개경 수복에도 큰 공을 세웠다. 1376년 원나라 황제가 고려 국왕으로 임명한 심양왕 탈탈불화가 군대를 이끌고 입국할 때에 이원계는 동지밀직 벼슬에 있다가 서북방어군의 조전원수가 되어 그들을 막기도 했다.

1377년에는 나세의 휘하에 들어가 강화도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1380년에 왜구가 또 다시 대대적으로 침입하자 전라도 일대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왜구 격퇴의 계기가 되었던 황산싸움에서는 이성계를 도와 전공을 세웠다. 1388년 요동 정벌 때에는 이성계 휘하의 조전원수로 출전하였고, 위화도 회군에도 참전하여 1390년에 회군공신에 책록되기도 했다.

이렇듯 이성계와 함께 전장을 누빈 까닭에 두 사람의 우애는 돈독했고, 이성계는 그의 어머니 이씨의 노비문서를 불태워 없앴다. 이성계는 또 조선 건국 후에 그에게 완산군의 봉직을 내리고, 그의 후손들에게도 각별한 신경을 쓰며 그들에게 모두 군(君)의 칭호를 하사했다.

이원계는 양우, 천우, 조, 백온 네 아들과 딸 셋을 두었다. 딸 중에 장녀는 장담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변계량에게 시집갔다가 버림을 받아 유정현에게 재가했으며, 셋째는 흥노에게 시집갔다가 버림받아 변처후에게 재가했다.

이화(李和)는 이성계의 이복동생이었다. 이화는 환조 이자춘이 1340년 노비 고음가를 취하여 낳은 아들이며 이성계 보다 다섯살 어린 이복동생이었다.

이화(李和)는 1388년에 이성계를 따라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 회군에 동참하였고, 그 공으로 회군공신에 봉해졌다. 또한 1392년에 이성계를 추대하여 왕으로 옹립하는 데에도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었다.

1398년에는 이방원의 편에 서서 왕자의 난을 도왔으며, 이 공으로 정사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도 이방원을 도왔고, 그 공으로 다시 좌명공신 2등에 올랐다.

이화(李和)는 이렇게 네 차례에 걸려 공신 목록에 오른 덕분에 공신들 중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하사받아 총 579결(약 1만 8천 평)의 공신전을 소유하였다.

1407년에는 영의정부사에 임명되어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탄핵하는 데 앞장서서,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화는 이듬해인 1408년 10월 6일 61세를 일기로 죽었다. 시호는 양소공(襄昭公)이며, 의안대군에 피봉되었다.

성격이 순박하고 용감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태조를 무척 따랐으며, 전장에서도 늘 태조(이성계) 곁을 떠나지 않아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왕자의 난 때 이방원 편에 선 까닭에 태조(이성계)의 원망을 들었다.

그는 자승, 숙, 징, 담, 교, 점 등 7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의 딸은 처음에 고려 종실 왕면(王冕)에게 시집갔다가 다시 최주에게 개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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