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다라국의 후예들
상태바
[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다라국의 후예들
  • 권우상
  • 승인 2020.03.04 16: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9.

풀벌레 소리는 그것이 울음소리가 아니라 뒷발인가 날개짓인가를 비비는 소리라고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 속에 감정이 없다면 어떻게 저토록 애잔하고 슬픈 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감정, 정말 감정이란 것은 뭘까? 달빛도 풀벌레 소리도 마당가에 피어 있는 저 꽃도 다 감정이 있는 것 같고 감정이 있기 때문에 자기처럼 가을밤이 깊어지고 있음을 함께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 같았다. 효동은 후원 쪽으로 발걸음을 돌려 몇 발자욱 걷다가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고방촌의 방 쪽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는 애절함이 배어 있었다. 이 깊은 밤에 피리를 부는 사람이 누굴까 궁금해 하면서 돌다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돌다리에는 제법 큰 연못이 있었다. 연못가 나무밑에 앉은 여인의 그림자가 보였다.

효동은 누구일까 궁금해 하면서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알았는지 여인은 피리를 불던 손을 멈추고 효동을 올려다 보았다. 여인은 옥청이었다. 효동은 무슨 일로 주무시지 않고 여기에 계시느냐고 묻자 옥청은 별로 놀라지 않은 채 눈을 들어 효동을 바라보면서

“막동님은 어인 일로 주무시지 않고 여기에 나와 계시어요?”

하고 물었다. 효동은 잠이 오지 않아서라고 대답했다. 효동은 피리 부는 솜씨가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옥청은 별것도 아닌 솜씨를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했다. 효동이 다시 한번 듣고 싶다고 했다. 옥청은 고개를 숙여 사의를 표하고는 금새 길고 흰 손가락이 피리 구멍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옥청의 손가락 움직임이 점차 빨라지면서 차츰 음율이 현란해졌다. 피리소리는 점차 빨라졌다.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는 애절한 소리였다. 어느 연인을 그리워하는 소리인 듯했다.

효동은 마치 탁순국 궁전의 후원에서 미파공주와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지던 소리는 더욱 애절한 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효동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탁순국 궁전에 있는 악공조차도 저처럼 애절한 소리를 내지는 못할 것이다. 손재주 만으로는 도저히 저런 소리는 불가능했다. 여인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이나 누구를 그리워하는 열정을 토해내지 않고는 피리에서 저런 애절한 소리를 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어느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워하는 소리인 듯 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어느 남자를 이토록 그리워하는 것일까? 효동은 갑자기 그것이 궁금했다. 효동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금 자기 옆에 미파공주가 있다는 생각에 몰입하자 미파공주의 얼굴이 뇌리에 덮쳐왔다.

그 때 옥청은 피리를 불던 손을 내리고 효동의 옆에 다가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밤은 더욱 깊어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다음날 효동은 옥청의 방을 찾아 어젯밤에 한 일에 대래 큰 실수를 했다면서 사과를 하자 옥청(玉靑)은

“이제 막동님과 저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남은 것은 아버지의 결혼 승낙뿐이어요”라고 말했다. 옥청은 아버지(고방촌)가 효동을 사위감으로 결정해 놓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효동은 놀란 얼굴로 옥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파공주를 두고 옥청과 결혼한다는 것은 효동으로서는 생각하기 조차 싫었다. 하지만 고방촌은 외동딸 옥청(玉靑)을 효동(孝童)과 혼인을 서둘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